위 글에 들어있는 정보들 중 정확한 사실이 아닌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나 견해가 다 수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갔다.
모든 성자에게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 미래가 있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건 폭풍우 속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일과 같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여정이다. 열심히 했지만 열심히 한 만큼 결과가 나지 않는 날도 있고. 힘을 내고 싶지만 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날도 있다.
먼 곳을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성장이란 더 넓은 세상에 홀로 놓인다는 뜻이다 부딪혀야 할 게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조금 더 외로워진다는 뜻이다
사람의 가치관은 큰 굴곡점을 지날 때 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내가 믿었던 신념이 깨지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확신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를 돌아보며 지난날 나의 미숙함과 경솔함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느낀다 혹시 내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나도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들의 가치관에 매우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을 수도 있음을 동시에 타인의 평가의 기준이 결코 내가 되어서는 안 됨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현재의 나의 철학이 틀릴 수도 있음을 배워간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무조건 옳은 것도 무조건 그른 것도 없음을 알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세상이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며 한 단계씩 성장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그 시작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답답한 게 당연하다. 끝도 없이 문제들이 주어지고 풀어도 풀어도 끝도 없고, 답도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신념을 가지고 묵묵히 지켜내면서 누가 가지 않은 길을 가려면 눈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길 위에서는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한걸음 한 걸음 떼는 것만으로도 부쩍 지칠 테고 길고 긴 방황을 피할 방법 또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꿋꿋함이다. 누군가 나를 밀어도 밀려나지 않고 꿈꾸는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꿋꿋함.
좌우명이 바뀐 횟수는 삶의 계단이 된다 고르고 고른 문장을 품고 살아가다 보면,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것처럼 가파른 절벽을 마주한다 그때 좌우명을 바꾼다 보통 해가 진후의 시간이고 다음날 눈을 뜨면 잊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절벽은 계단이 된 것 같고, 그나마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좌우명이 무엇인가는 중요치 않다 절벽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찰나의 머무름이, 삶을 계단으로 만든다.
당장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 언젠가는 그 역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오리라 믿기에, 그리고 내가 든 첫 번째 촛불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희망이 되리라 믿기에. 지금도 누군가는 홀로 몸을 웅크린 채 이 길을 걷고 있겠지.. 지금 신념을 가지고 고민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에게 온기 한껏 모은 손 건네며 혼자 아니라고 진심을 나누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일 자체를 즐기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은 아름답다. 그 일 자체가 소위 말해 '레드오션'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보기에 '전망'이 그다지 좋지 않다해도.. 본인이 좋아죽으면 해야지, 밥을 굶더라도 잠을 못 자더라도 하고 싶다면 해야지 후회가 없을 거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이 밥을 굶어야 하는 일이라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해봐야 하는 거 같다. 그것이 20대 때는 '도전'이고 '열정'인데, 내가 책임질 사람이 '나' 뿐이면 상관없는데.. 나이가 들면 책임질 사람도 는다. 뒤늦게 그때 가서 도전하면 응원해 줄 사람보단, 비난할 사람이 훨씬 많아진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사람은 겁이 많아진다.
지극히 당연한 거다. 이루고 싶은 불확실한 꿈 보다는 부족하지만 명확한 현실에서 지키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줄어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말이 좋아하는 일<만>하며 살라는 말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때론 하기 싫은 일도 견뎌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기쁨의 크기만큼이나 그것을 추구하는데 따르는 고통의 크기도 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견뎌내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싫어하는 것 마저도 감수하며 그것을 지켜내는 것. <그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말>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싶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일을 한다. 연기를 하기 위해 편의점 알바를, 노래를 하기 위해 고깃집 알바를, 춤을 추기 위해 치킨 배달을,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루를 1,2부로 쪼개서 라도 한다. `나 진짜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일에 치여서 할 수가 없어`라는 말은 `난 그걸 <그 정도로> 하고 싶은 건 아냐`라는 말과 같은 말 아닐까?
표절은 쉬운데 스타일의 개발은 어렵다. 확신을 가지는 방법은 부딪치고 깨지고 그 조각들을 모아 재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생각만으로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이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그걸 확신이라고 말한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단지 호기심일 수있다. 확신을 만들기 위해선 그 호기심을 가지고 직접 부딪쳐야 한다. 깨지더라도 또다시 그 조각들을 모아 부딪쳐야 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웬만해선 쉽게 깨지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믿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확신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실력이다. 기술은 집중하면 단기간에 얻을 수 있다. 마음먹고 공부하면 내 비즈니스에 필요한 기초기술 정도는 몇 달 만에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실력은 오랜 시간 동안 갉고 닦아야만 얻을 수 있는, 내가 먹고살 수 있는 코어 콘텐츠이다. 먹고사는 기초 실력이 없으면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
쌓아 놓은 데이터가 없는 사람은 통찰할 데이터가 없으니까 욕망에 의한 꿈만 꾸게 된다. 어떤 사람이 <나는 부자가 될 거야>하고 말했지만 그 꿈이 정말 현실이 될지는 그 꿈이 단순한 욕망에 의한 꿈인지 구체적인 통찰에 의한 꿈인지에 따라 결정되다. 만약 욕망에 의한 꿈이라면 계속 꿈만 꾸지 부자 근처에도 못 갈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 피나는 노력 수많은 <상처>의 경험에 의한 꿈이라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근거, 데이터가 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든 관계 없이 당신의 마음상태와 감정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한다 상대방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그것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나 또한 나의 의지로만 내 삶을 조각해온 것이 아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나의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무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수많은 타인과의 만남과 뜻밖의 우정이 만들어낸, 영원히 풀 수 없는 복잡한 인연의 결과물이 바로 나다.
사회생활이란 어금니를 악무는 동시에 활짝 웃는 법을 터득하는 과정이다 지기는 싫고 절박해 보이면 안 되고 자신은 없고, 불안해 보이면 안 되고 꼴 보긴 싫고, 냅다 밉보이면 안 되고 정말 어렵다.
살아간다는 것
살아진다는 것
살아내야 한다는 것
무심히 짙어지는 생의 농도
부지런하다는 건 늘 바쁘게 사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들을 늦추지 않고 하는 거구나
강하다는 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싶은가?
할수 있는가?
그렇다면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고 있는가?
내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마다 앞에 놓인 계단은 더 높아져 갔고 한숨은 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렸다.
예전엔 참 주저리주저리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나의 일화 등을 말해주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그 일이 일어난 전말부터 그래서 어떤 생각과 어떤 감정을 느꼈고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쭉 설명해 주며 그 사람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좋았다.
나 자신이 누군인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했다. 태어났으니 그냥 살아지던 시절에는 나를 설명해서 상대방을 설득해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남들이 나에 대해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슬픔과 기쁨을 모두 이야기했다. 내 마음을 말로 허공에 다 날려버리며, 말을 하고 또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고독이 숨어 있었다.
기본이 부족하면 쓸데없는 서사가 길어진다
요리도, 글도, 단순해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알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는 비겁함과 조급 함이다
인생은 진심이 부족해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요령이 부족해서 망가진다
거절하는 요령을 몰라서 번아웃이 오고
거리를 두는 요령을 몰라서 연애가 망하고
하기 싫은 것을 시작하는 요령을 몰라서 일을 미룬다
나 자신과 연결된 요령을 늘려나가는 일이 현명한 삶의 지향점일 것이다.
일에 지쳐 방황을 하는 것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고개를 숙이는 일도, 삶의 정체성을 잃어 좌절을 하는 것도 사람을 잃어보는 것도, 사랑에 아파해보는 것도 행복이 어떤 것인지 깨닫기 위해 겪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촉이란 원래 지능과 상관 없이 오랫동안 몸으로 고생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성실한 노동으로 절실한 촉을 갈고닦아온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찾아낸다. 반면 절실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과 연결되려는 강한 욕구가 없다면 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안 보이기 마련이다.
나를 믿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안해도 많은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속에서 성공과 실패 속에서 내 역량을 알게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판단을 하는 나를 믿을 수 있다. 내가 나를 못 믿는 건 내가 나를 잘 몰라서이고 잘 모르는 이유는 많은 도전을 안 했기 때문 일 수 있다.
되고 안되고는 신의 영역이고 하고 안하고는 나의 영역이다. 나는 신의 영역에 개입할 수 없고 신도 나의 영역에 개입할 수 없다. <되던지, 말던지> 나의 영역인 <하는 일>에나 신경 쓸 뿐이다.
흔들리는 바람 속에도 내가 온전히 나로 서있을 수 있는 일, 세상의 상처에 더 이상은 도망가지 않는 일. 나는 줄곧 그런 일이 하고 싶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을 강해진다고 표현해 다면 지금은 다르다. 그건 나 다우너 지고 싶다는 말이다. 상처받지 않을 수 없지만 더 피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다. 뿌리부터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삶은 끝없는 증명이다. 그 누가 믿어주지 않는데도 상관없다. 삶은 애초에 타인에게 기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나 혼자서 해야 할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가고 싶은 길을 찾았다면 스스로 발걸음을 떼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지금 나로써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 일들을 하면서 단 한순간도 흉내를 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런 일을 하면 된다 남들 보기에 멋진 일을 흉내 내는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맞는 재미있는 일을 해나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내가 선택한 것들이 곧 나의 삶의 이유가 될 것이고 삶의 목적이 될 것이고 삶의 의미가 될 것이다. 내 의지대로 선택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책 없는 솔직함,
설명 할수 없는 따뜻함,
부담스럽지 않은 친절함.
멋지지만 어렵지는 않은 것,
평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것,
본질을 볼 줄 아는 것,
생각하지 않고 볼 줄 아는 것,
볼 때 볼 줄 아는 것,
볼 때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할 때 보지 않는 것,
무엇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
지치고 힘들어도 이겨내는 방법을 찾는 것
좋아하는 것과 행복한 것들을 찾아가는 것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아는 것
아낌없이 주는 마음과 미련 없이 떠나는 자세를 배우는 것
생이 끝나기 전까지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것.
아픔을 느껴보지 못한다면 행복 또한 알 수 없다.
그리고 힘들고 긴 거리를 걸어가는 것만큼 앞으로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단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얼굴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는 내가 주변상황에 영향을 받기만 하지 않는다. 내 사람과 태도와 가치관이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을 더 넓게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만 남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
'본질에 대한 탐구 기록 - Disciplin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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